불교철학

w02-2, 2011. 03. 10. ~
  김미영 교수님

  불교와 인도철학

  본격적으로 불교철학에 대해 논하기 전에 우리가 해야할 작업이 하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바로 불교를 종교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철학으로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물론 우리의 목적은 불교철학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불교를 철학으로서 바라볼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를 철학으로 바라보기 전에 간략하게나마 종교로서의 불교는 어떠한 특징이 있는지 알아보자.
  종교로서의 불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는 종교라는 단어가 어디에서 왔나 생각해봐야 한다. 종교라는 단어는 서양의 religion이라는 단어의 번역어이다. 그렇다면 religon은 어떠한 개념일까? religion의 어원은 '단단히 묶는다'라는 뜻을 가진 religare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과 무엇을 묶는 것일까? 서양에서는 그 대상을 각기 사람과 절대자, 신으로 보았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서양의 종교적 관점에 의하면 불교와 유교는 종교가 아니게 된다. 즉 서양의 본래의 종교라는 개념은 다소 편협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종교'로 취급되는 것들을 모두 포괄하기 위해서는 새로이 개념을 세워야 할 것 같다. 이에 대해서 세계의 철학자들이 내놓은 종교 개념이 있다. 그것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먼저 가츠노 즈키라는 사람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방식은 각각의 문화권마다 다르다"라고 말하며, 종교를 그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하나의 의식, 행위로 보았다. 그리고 이런 관점을 각각의 종교에 대입해서 보면, 유교는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제사를 지내며, 인도에서는 윤회설을, 기독교에서는 내세에서의 영생을 이야기하였다. 이러한 점을 살펴보면 가츠노 즈키의 말은 어느 정도 타당한 것 같다.
  그리고 Lama Anaganla는 종교에 대해 "자연법칙에 따라 생물이 자라나듯이 자라나는게 종교다"라고 하였으며, Gavinda는 "풍토에 따라 다르게 자라나는 나무와 같이 종교도 그렇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해 무엇이 더 우수한지 논쟁을 벌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라고 하며 종교에 대한 논쟁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위의 관점들로 봤을 때, 이제 불교는 종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는 불교가 가지는 종교적인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자. 불교는 우리가 흔히 알듯이 깨달음을 중시하는 종교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깨달음인가? 깨달음의 목적은 무엇인가? 먼저 불교의 깨달음의 목적부터 이야기하자면, 그 목적은 당대의 인도철학과 동일한 삶과 죽음의 반복에서 벗어나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깨달음을 얻는가? 그것은 개인의 체험에 의한 수행으로 가능하다.
  즉 불교의 특징은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개인의 체험을 중요시하는 종교이다. 그 이유는 붓다가 말하듯이 개개인의 문제가 다르듯이 문제의 해결방법도 개개인마다 다르기 떄문에, 깨달음의 내용도 개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을 필연적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가지는 불교의 특징은 다른 종교에서 흔히 세우고는 하는 형이상학적 문제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붓다가 이야기하듯 그러한 문제들보다는 우리가 지금 이 순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붓다는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 큰 혼란을 가중시킨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w03-1, 2011. 03. 15.
  종교로서의 불교의 특징을 알았으니, 지금부터는 철학으로서의 불교에 대해서 알아가보도록 해보자. 철학으로서의 불교를 알아보기 이전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불교가 대두하기 이전의 인도철학은 과연 어떠하였는가이다. 그 이유는 불교철학 개강에서 말하였듯이, 불교의 탄생은 기본적으로 인도철학에 대한 비판에서 나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불교철학에 대해서 알기 위해선 인도철학에 대한 지식은 거의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인도철학이 추구하는 방향은 궁극적인 깨달음이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현재의 불완전한 상태에서 완전한 상태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불완전한가? 그리고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우리의 불완전함은 우리의 육체가 가지는 유한성에서 온다. 이러한 유한성은 곧 우리에게 속박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유한성과 속박은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 인도철학에서는 공통적으로 이러한 불완전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추구한다. 그리고 완전한 상태로의 추구란, 무한자, 절대자에의 추구이며, 완전한 상태는 곧 그와 합일의 상태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불완전한 상태에서 벗어나 완전한 상태로 갈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깨달음이다. 그리고 깨닫기 위해서는 바로 개인적인 체험과 지식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철학에서는 개인의 수행을 중시한다.
  불교가 인도철학과 다른 점은 완전한 상태에서 절대자를 가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개인이 수행을 해야한다는 점에서는 인도철학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왜 완전한 상태에서의 절대자를 가정하지 않는 것일까? 붓다는 그 이유를 당시 사람들이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을 하고 절대자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행위가 오히려 사람을 속박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는 형이상학적 문제나 지식에 대해서는 침묵을 통해서 종결하였다. 하지만 붓다가 형이상학적 지식에 대해서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다. 붓다에게 있어서 지식이라는 것은 차안(현세)에서 피안으로 건너가기 위한 뗏목과 같은 수단이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강을 건넌 후에 피안이라는 언덕을 오르기 위해서는 그 뗏목을 버려야 올라갈 수 있는데, 그 수단이 되는 지식을 버리지 못 해서 결국엔 피안으로 가는 것을 포기한다고 붓다는 생각하였다. 붓다는 이러한 위험성 때문에 형이상학적 지식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던 것이다[각주:1].
  그렇다면 붓다의 가르침은 어떠한 내용일까? 붓다에게 있어서 삶이란 개개인마다 다른 것이다. 그리고 개개인은 서로 다른 삶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가 깨달아야 할 내용도 다르다는 것이 붓다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붓다가 대중들에게 설법을 하는 것이 옳을까? 붓다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그가 내놓은 가르침은 깨달음 자체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바로 삶에 대한 통찰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탐색을 하도록 하는 가르침이었다.
  즉 불교의 경전의 내용은 이러한 붓다의 가르침과 붓다가 깨달은 것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는 당연히 불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붓다는 누구인가? 붓다Buddha라는 말은 인도에서 깨달은 자를 뜻하는 말이다[각주:2]. 즉 붓다는 깨달은 자를 통칭하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라도 깨닫기만 한다면 붓다가 될 수 있다. 또한 불교Buddhism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는 깨달음을 중시하는 종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목적은 행복해지는 것에 있으며, 그것은 구속에서 벗어날 때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가? 붓다는 깨달아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앞에서 말했듯이, 깨달아야 할 것은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다 고통을 가지고 있다. 인도철학에서는 전통적으로 그 원인을 생로병사에서 찾았다. 붓다도 마찬가지다. 다만, 붓다는 인도의 전통철학에서 생로병사의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인 고행을 육체에 대한 학대로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그가 또 수행을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육체의 유한성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에 대한 문제와 정신적 희열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였는데, 그의 답은 수행을 함에 있어서 육체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고행과 쾌락 사이의 중도의 수행을 뜻한다.
  그는 또한 깨닫기 위해서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 버려야 할 것을 3독, 즉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이 일단 중요하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벗어나는가? 그것은 개인의 노력에 의해서 가능하다. 흔히 불교 경전에 대해서 떠올릴 수 있는 구절인 '천상천하유아독존'도 이 뜻을 함축하고 있다. 즉 삶은 자기 자신이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업보는 나 밖에 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붓다가 설한 내용과 깨달음의 방법이다. 이 이후로 불교는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로 나뉘게 되는데, 여기서 승은 탈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소승이라는 말은 탈 것이 작다는 의미로 혼자서만 피안으로 건너갈 수 있는 탈 것을 말한다. 대승은 여러명이 탈 수 있다는 뜻으로 대승불교가 가지는 대중구제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소승불교가 소승이라 불린 까닭은 그들의 주된 목적은 대중구제에 있다기 보다는 교리연구에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의 교리는 전체를 삼장이라 부르는데, 삼장은 경장과 율장, 논장으로 나뉜다. 경장의 내용은 성인들의 말씀과 붓다의 설법이 주를 이룬다. 율장에는 불교에서의 계율과 규율이 담겨있으며, 논장에서는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이 얼마나 논리적으로 완벽한 지를 설명하는 내용이 담겨져있다. 논장의 내용은 어려운 내용으로 흔히 말하는 엘리트 불교의 소산물이다. 각각의 불교의 경전들은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 티벳트어와 한문으로 쓰여져 있다.
w03-2, 2011. 03. 17.
  본격적으로 불교철학에 대해 논하기 이전에, 간략하게나마 인도철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인도의 전통철학의 배경은 흔히 신성한 지식이라 불리는 '리그 베다Rig Veda'(B.C 1500 - 1000)와 관련이 있다. 베다란 본집을 뜻하는 말로 주로 찬가나 제례, 주사의 내용이 들어있다. '리그 베다'의 경우 그것을 쓴 주체는 주로 아리아인들이다. 그 다음에 나온 경전은 '브라마나Brahmana'(B.C 1000 - 800)으로 이 책은 리그 베다의 주석에 가까운 책이다. 그 다음은 중간 단계의 책으로서 '아라냐카Aranyaka'라 불리는 책으로 한자어로는 삼림서라고 불린다. 그리고 마지막의 베다의 끝으로 불리는 것은 '우파니샤드Upanisad'(B.C 800 - 200)이라는 책이다. 이 책들의 순서를 잘 알아두도록 하자. 그래야 인도의 전통철학의 발전 과정을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인도의 전통철학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가 앞의 나왔단 경전 리그 베다의 말을 따르는 베다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원래 인도에 있었던 금욕주의 전통이다. 금욕주의라는 말이 붙은 이유는 아리안 족들의 특징이 현세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는 신의 모습만을 보아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금욕주의 전통은 주로 자기자신의 절제를 목표를 하며,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인도의 고행자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전통이다. 금욕주의 전통은 초기 인도에서는 그 모습이 드러나지 않다가, 아라냐카 시기부터 점차로 그 모습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다. 그리하여 우파니샤드 시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금욕주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심지어 요가적 명상에 의해 얻어진 지식에 대해서도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베다 전통에서 추구하는 범아일여가 기존의 방법으로는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이들은 요가적 명상을 통해 초감각적 지각을 통한 지식의 획득을 꾀하면서, 자아atman의 계발을 하였다.
  그리고 앞의 인도의 전통철학에 반발하여 나온 것이 인도의 반전통철학이다. 그들의 대표하는 집단은 물질주의자들과 아지비카 학파, 자이나교도들이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의 역사적 배경에서 이야기하도록 하자.


각주


  1. 1) 형이상학적 지식, 가설 등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자세 말고도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뒤에 인식론에서 다뤄질 것이다. [본문으로]
  2. 2) Buddhi라는 말은 깨달음, 지혜, 보리심을 뜻하는 말이다. [본문으로]